흑암 가운데 빛을 주시는 새 창조의 하나님(출 10:21-29)
이집트에 흑암 재앙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이 거주한 곳은 어떠했나요?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주관하시는 창조주입니다. 아홉 번째는 흑암 재앙입니다. 흑암 재앙은 이집트에 임할 마지막 재앙과, 출애굽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경험할 구원 역사와 긴밀히 연결됩니다. 첫째, 이집트를 뒤덮은 흑암은 이집트에 임할 마지막 재앙인 '유월절의 밤'(장자 죽음) 사건의 예표입니다. 둘째,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곳에만 빛을 주신 것은 홍해 횡단 사건 때 이집트 진과 이스랑엘 진을 나누신 일의 예표입니다. 이와 같은 흑암과 빛의 대조는 창조 첫날을 떠오르게 합니다(창 1:2-3). 흑암 가운데 빛을 주시는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통해 새 창조를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큰 빛을 보게 하신 구세주입니다(마 4:16).
하나님 백성이 흑암 같은 세상 속에서도 소망을 지닐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온 이집트 땅에 흑암을 내리게 하시면서도 이집트 땅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사는 곳에는 빛으로 밝혀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아무리 흑암 같은 세상 속에서 살아갈 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빛으로 밝혀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흑암 같은 상황에 처하느냐 처하지 않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길을 잘 아셔서 우리에게 때로는 연단의 상황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때때로 흑암 같은 상황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우리가 어두움과 빛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고 있다면 낙심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보다 우리의 상황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기가막힌 타이밍에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그 어떤 순간에도 우리 하나님 그분입니다.
모세가 단호히 바로의 타협안을 거절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교활한 타협안은 완악함의 발로입니다. 바로는 모세에게 가축을 두고 가면 떠나도 좋다는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바로의 이러한 제안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무효화하려는 흑막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면 가축이 꼭 필요합니다. 따라서 가축을 두고 가는 것은 출애굽의 본래 목적에도 어긋납니다(5:3). 모세는 단호히 바로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러자 바로는 모세를 다시 보는 날에는 죽이겠다고 협박합니다. 하지만 정작 죽게될 이는 바로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14:23, 27). 성도는 '일부'만 양보하라는 세상의 타협안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은 결국 우리 신앙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99% 순종이 아닌 100% 순종을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이 내게 약간만 신앙을 양보하라고 요구할 때 나는 어떻게 대응할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불행의 상당히 많은 부분은 우리가 자초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시면서 즐거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에덴동산을 지으시고 인간들이 행복해하며 즐겁게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고 반역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자기 생각에 옳은대로 산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집트에 내려진 재앙들은 그런 의미에서 바로의 선택이며 고집부린 결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집부리게 조종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들의 불행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소리가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 앞에 깨어 근신하며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빛과 어둠을 주관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하심이 우리의 소망이며 능력이며 담대함입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빛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우리 마음의 교만과 고집을 날마다 깨뜨려 주소서. 주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어두워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려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