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과 신앙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요 4:43-54)
예언자가 고향에서는 왜 존중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성경에는 서로 모순된 것같이 보이는 구절이 있습니다. 본문이 그런 구절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가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고 하셨는데(44절), 고향 갈릴리에 도착하셨을 때 환영받으십니다(45절). 이에 대한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갈릴리에서 환영받은 것은 사람들이 표적을 보고 환호하는 것이 뿐 예수님을 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는 ‘그를 영접하니’라는 표현의 해석을 어렵게 합니다. 둘째, 예수님 고향을 유대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는 그분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과 배치됩니다. 그러므로 고향을 고국인 이스라엘로 넓게 보고 예수님이 전반적으로 반대에 직면하셨지만 이번에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그분을 환영했다고 해석하면 본문의 모순이 어느 정도 해결됩니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지체가 공동체 사역자로 섬길 때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부르신 것이며, 또한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감당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충성되게 여기셔서 우리에게 섬길 수 있는 직분을 주시고, 또 그 직분을 감당할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주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 모두는 모양은 다르더라도 모두가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사역자로 부름 받았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부르심의 주관자이며 우리는 다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분별하여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한 예전의 모습, 예전의 편견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불러 쓰시는 자를 존중하지 않는 다면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병든 아들이 회복되는 표적을 목격한 왕의 신하는 어떤 결단을 했나요?
복음서에서 표적과 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이 상반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도 표적만 추구하는 것을 예수님이 책망하시는 경우(48절)와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에서 치유되는 표적을 보고 신하와 온 가족이 신앙에 이르게 된 경우를 함께 언급합니다(53절). 표적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예수님이 표적을 통해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시기에 그분을 믿게 됩니다. 한편 단순히 표적의 결과만 좇아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은 진정한 신앙인이 아닌 것으로 봅니다. 표적만 추구하는 신앙이 결함이 있다는 것도 옳고, 표적을 목도하고 예수님을 인정하고 믿게 되는 신앙도 옳습니다. 다만 개인적.이념적을 둘 중 하나를 배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표적만 좇거나 표적을 철저히 배제하는 신앙은 각각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표적을 주신다는 사실과 표적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게 하기 위해서 표적을 주실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표적을 주시는 이유는 표적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구하게 하시려는 목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기도:
주 예수님! 우리에게 주시는 여러 가지 표적들을 볼 때 주님을 더욱 바라보고, 주님의 사랑을 더욱 경험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 이 땅에 임하게 하신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창조의 일을 날마다 행하시는 분임을 믿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믿고 사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