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을 위해 살라(롬 6:1-11)
성도가 죄를 멀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죄가 가득한 곳일수록 하나님 은혜가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에 대해 누군가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하려면 죄를 더 지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분명히 답합니다. 물론 죄가 더한 곳에 은혜도 더욱 넘칩니다(5:20). 그러나 의롭게 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다시 죄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해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해 다시 살아나 그분과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은 성도는 죄의 지배에 자신을 내어 주는 방종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누리게 된 새 생명 가운데 거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새 생명을 누리게 된 내가 멀리할 죄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죄를 전혀 안 짓고 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겨야 할 이유, 즉 우리가 죄를 미워하고 죄를 멀리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죄인인 나도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죄와 죽음의 법에 지배를 받는 내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통치를 받는 새 생명을 얻는 나입니다. 외모가 바뀌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나는 내가 더 이상 죄의 통치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죄와 함께 주님을 섬길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죄를 미워하고 모양이라도 버리기 위해서 마음을 쓰고 기도하고 싸워 이겨야 합니다. 죄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의지를 가지고 싸워 이겨야 합니다. 죄에게 지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이겨야합니다.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죽은 사람은 어떤 일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이전에는 죄의 명령에 무조건 반응하고 따랐지만, 이제는 죄의 유혹에 저항하고 맞설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의 몸’(6절)이 십자가에서 죽어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변화가 나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죄의 몸’은 육체 그 자체가 아니라 죄가 요구하는 대로 자신의 몸을 죄의 도구로 사용하는 타락한 본성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아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해,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누리려면 죄와 결별하고 의와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해 살아 있는 자답게 오늘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죄에 대해서는 죽고 부활에 대해서는 살게 된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을 부활의 산 소망이 지배하게 될 때 죄의 세력은 저절로 우리 삶 가운데 물러가게 됩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기보다 선한 일을 힘쓰십시오. 선한 일에 열심 내는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살다보면 죄를 지을 시간이 없어질 것입니다. 부활의 산 소망도 결국은 우리가 죄에 거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주님과 함께 부활하게 될 소망으로 가득한 사람이 죄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죄와 죽음의 법에서 건져 내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성도는 이제는 죄인처럼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믿습니다.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않게 하소서. 주님과 연합하여 죽고, 장사되고, 부활한 것을 잊지 않고 살게 하소서. 주님 안에서 날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 은혜로 살아가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