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약자를 위해 악인을 징벌하소서(시 10:1-18)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어찌하여'라고 탄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그분의 때가 차기까지 악인들의 악행을 허용하시고 침묵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악한 자가 가련한 자를 괴롭히는데, 어찌하여 하나님이 가만히 게시느냐고 탄식합니다. 그는 악인의 행태를 자세히 설명합니다(3-11절). 악인은 탐욕을 자랑하면서 하나님이 없으니 감찰하는 이도 없다며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멀어서(높아서) 자신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악인의 입과 혀는 기만, 폭언, 욕설, 악담으로 가득합니다. 은밀한 곳에서 죄 없는 자를 죽이는 행동은 숨어 있다가 먹잇감을 덮치는 사자와도 같습니다. 사람이 악을 행함에 담대한 이유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이 영원히 감찰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고 하는 행동들은 무엇인가요?
악인이 악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담력을 주고 교만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은 죽은 신이며 감찰하지 않는다는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교만입니다. 그래서 죽은 신이며 감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악이 가능해집니다.
악인들은 그 마음의 욕심을 자랑합니다. 이 말은 악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성취할 수 있다고 교만하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없이도 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탐욕을 부린다는 말은 부당한 이득을 취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이 말은 악인들이 가진 권력이나 금력을 가지고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에게서 떠납니다.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시편 기자가 간구한 '불쌍한 사람의 소원'(17절)은 무엇인가요?
시편 기자는 탄식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일어나십시오. 손을 들어 악이을 벌하여 주십시오. 고난받는 사람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12절). 하나님이 재앙과 원한을 돌아보시고 맡아 주시기에 가련한 사람이 주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신뢰 속에서 그는 악한자의 팔(세력)을 꺾어 악을 없애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이방 나라들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영원한 왕'이십니다. 불쌍한 사람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 마음을 견고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심하게 감찰하시며 고아와 압제당하는 자가 이 땅에서는 더는 위협받지 않고 살게 하십니다.
악이 만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통치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요?
아마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가 악인의 형통 일 것입니다. 열심히 믿음으로 산다고 살아왔는데 갑자기 주변을 돌아보니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잘사는 것 같고 믿음으로 살아온 나는 고난의 연속일 때 우리는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불공평하신가? 하나님은 세상에 관심이 없으신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악인들과 의인들을 올바르게 구분하시고 있느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악인들이 누리는 호사를 복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건강하고 좋은 차를 타고 자녀들이 잘되는 것들에 대해서 불공평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를 주목해야 합니다. 가련하고 외로운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통치를 간구합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만나 주십니다. 그 마음을 평강으로 지켜 주십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입니다. 늘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나를 눈동자와 같이 바라보시며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는 주님께서 주님의 선하신 뜻대로 신실하게 일하실 것을 믿습니다. 늘 주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