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경청의 자세가 위로의 시작입니다(욥기 21:1-16)
욥이 친구들에게 간청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잘 경청해 주기만 해도 큰 위로가 되는 법입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먼저 자신의 말을 잘 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 자신에게 위로가 되겠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이 먼저 충분히 말한 다음에 행동하라고 합니다. 조롱하더라도 충분히 듣고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말이 누구를 향하는지 알아 달라고 호소합니다. 욥의 탄식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해할 수 없고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이 없기에 그는 초조해합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이 얼마나 참혹한지 제대로 봐 달라고 호소하며, 친구들의 긍휼을 구합니다.
고난당하는 지체를 정죄하기보다 그의 괴로운 심정을 들어 주는 것이 왜 필요할까요?
고난당하는 사람은 왜 자신에게 이러한 고난이 닥치게 되었는지 여러가지 이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고난당하는 사람은 어떤 감정을 느낍니까? 혼돈, 두려움, 답답함, 외로움, 절망감, 수치심 등을 느낍니다. 이러한 복잡한 생각과 혼돈가운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때 누군가에게 이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고 상대방이 그것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습니다. 또 자신이 이야기를 하면서 복잡했던 생각이 정리되고 길이 보이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통로가 됩니다.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보게 됩니다.
욥의 말에 따르면, 현재 번영을 누리는 사람은 결국 어떤 사람인가요?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이해하기 힘든 부조리한 상황이 필쳐지곤 합니다. 욥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악인이 장수하고 번영하는 모습을 목도합니다. 그들의 후손도 대대로 굳건히 서는 복을 누립니다. 그들의 집에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막대기(9:34)가 아니라 평안이며, 그들의 가축까지 번성합니다. 악인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아닌, 복과 번영을 누립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멀리 떠나시기를 바라고, 그분께 기도하는 것을 무의미하게 여깁니다. 이렇듯 욥은 하나님의 복 주심 없는 잘됨이 있기도 하고, 하나님 없는 형통이 나타나기도 하며, 구원자 없는 구원이 있을 수 있음을 경험합니다. 그런데도 욥은 악인의 계획을 거부합니다(16절). 이는 신앙에 굳건히 서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결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어떤 위험성이 있을까요?
현재 나타나는 그 사람의 외적인 삶의 결과로 그 사람의 옳고 그름과 하나님의 일하심을 평가하려고 하면 하나님과 그분의 일하심을 오해하고 심각하게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한 사람이 현재 건강하고 부유하고 권세있고 일이 잘된다는 것이 그 사람이 하나님께 사랑받고 인정받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반대로 한 사람이 장애인으로 태어나거나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거나 현재 병들고 가난하고 압제받고 어려운 일을 겪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외면당한 악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따르다가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아벨과 요셉과 모세와 다윗이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조롱당하고 채찍질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 현재의 결과로 사람을 평가하는 시각으로 보면 이렇게 고난당하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외면당한 악한사람인 것입니다. 현재 결과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며 왜곡하는 것이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죄인과 세리와 창녀의 친구라고 불리셨던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너무나 쉽게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여 정죄했던 우리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병든자와 죄인을 섬기기 위해 오셨던 주님의 그 사랑과 섬김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음을 기억합니다. 우리 또한 주님과 같이 겸손히 낮은 자리에서 섬기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