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가르는 두 길, 영생과 멸망(요 3:9-21)
니고데모는 왜 ‘우리’가 아닌 ‘너희’의 일원이었을까요?
믿음은 하나님 나라 편에 서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대화하시면서 그분의 편과 니고데모의 편을 나누십니다. ‘나(예수님)와 너(니고데모)’의 대화에서 ‘우리와 너희’(11절)의 대화가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너희’는 하늘의 일이든 땅의 일이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그분 말씀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분명히 가르십니다. 불신자는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될 수 없기에, 예수님은 이러한 대화법을 통해 불신자를 깨우쳐 신앙의 길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와 ‘너희’ 중에 나는 어느 편에 속하나요?
니고데모는 구약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알고 믿는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구약에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셔서 행하실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을 이 땅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조차 믿지 못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당신은 당신이 행하는 부분에 대해서만 성경을 믿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이론으로만 지식으로만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삶에서 순종하므로 알고 보는 것을 행동을 말하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인가요, 심판인가요?
예수님은 ‘너희’에게 ‘우리’가 되라고 초청하시며 그 길을 알려 주십니다. 그렇게 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하늘과 땅을 연결하신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통해 사람들은 이 땅에서부터 영생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영생은 단순히 의미 없이 영원을 사는 삶이 아닙니다. 창조 목적대로 영원토록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입니다. 그 반대인 멸망은 창조 원리에서 벗어난 삶으로, 피조물이 악을 사랑하면서 악과 연합해 사는 것입니다. 성도는 영생과 멸망, 빛과 어둠, 선과 악 중에서 무엇을 더 사랑해야 할까요? 선택에 대한 책임은 자신의 몫입니다. 진리의 빛을 선택하는 성도는 이 땅에서부터 영원까지 참생명을 누립니다.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누리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일반계시인 자연만물과 특별계시인 성경말씀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 너희를 만드신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그리스도, 구원자이신 주 예수를 믿고 그분과 연합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함께 교제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 인생의 질문이 생겨날 때 우리는 그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께로부터 답을 듣고 그 답에 순종할 때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의 기도:
주님! 말로만 믿고 지식으로만 믿고 실제 삶으로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했던 죄를 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위해 행하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을 분명히 보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소서. 우리의 하루하루가 의미 없는 어둠속의 삶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동행하는 생명이 넘치는 삶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