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묵상하는 복 있는 사람(시 1:1-6)
복 있는 사람은 '따르고, 서고, 앉는' 행에서 악인과 어떤 차이를 보이나요?
복 있는 사람 악인들에게는 부정적 태도를, 하나님께는 긍정적 태도를 보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일상에서 '따르고, 서고, 앉는' 세 가지 행위에서 분명한 판단을 합니다. 첫째, 악인들의 생각을 '따르지 않아' 그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둘째,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아' 그들과 다른 인생길을 택합니다. 셋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이 않아' 그들과 교제하지 않습니다. 반면 복 있는 사람은 자신의 즐거움을 '주님의 율법'에 두고 밤낮 그 율법을 묵상합니다. 여기서 묵상은 '말씀을 중얼거리듯 곱씹는다'는 뜻입니다(신 17:18-20; 렘 15:16; 겔 3:1-3). 하나님 말씀을 인생의 인도자로 삼는 사람은 시냇 가에 심은 나무가 시들지 않고 열매를 맺듯 성공적인 삶을 삽니다.
내가 말씀을 따르기 위해 멀리할 삶의 자리는 어디인가요?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살아있는 증거이며 통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들고 가지 못할 곳은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오해하여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나는 세상을 멀리하겠다." 아예 불신자들과의 만남 자체를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그렇게 우리가 멀리할 삶의 자리을 오해하게 되면 아예 세상을 떠나 깊은 산속의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멀리할 삶의 자리는 불신자들과의 만남 자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악한 생각, 죄를 짓는 삶의 방식, 오만한 태도를 멀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늘 붙들고 겸손히 그 말씀의 다스림에 순종할 때 우리가 어디에서 살든지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지 우리를 둘러싼 문화가 어떻든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선한 열매를 맺으시며 하나님의 일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악인의 길은 결국 어떻게 되나요?
악인들은 복 있는 사람과 반대로 행동합니다. 그들은 '따르고, 서고, 앉는' 행위에서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시냇가에 심긴 나무 같지 않고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 같습니다. 바람에 흩날린다는 묘사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35:5; 사 17:13; 습 2:2). 알곡과 쭉정이는 구분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키질을 하면 가벼운 쭉정이는 바람에 날려 가고 알곡만 남습니다. 악인들도 처음에는 의인들과 잘 구분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심판 날이 되면 분명히 구분됩니다. 심판 때, 악인들은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 같아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망할 것입니다. 의인들이 가는 길과 악인들이 가는 길의 종착점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의 길을 어떻게 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성령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질문 자체를 고민하지도 답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주셔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살아 반응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말 중에 "생각이 말을 만들고, 말은 행동을 만들고, 행동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인격을 만들고, 인격은 운명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주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의 말과 행동과 태도가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으며, 하나님이 의도하신 자리에 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의 길은 신실하신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인도하시는 것을 신뢰하며 하나님 그분만을 바라고 추구하며 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께서 세우신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생각과 삶의 방식과 태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주님의 뜻과 삶의 방식과 태도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선하심과 영광과 능력이 사람들에게 드러나 그들이 주님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이 정복당하고 통치받으며 새로워지기를 사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