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할 수 없는 하나님, 까닭 없이 당하는 고난(욥기 9:11-24)
욥이 의로울지라도 하나님께 대답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능력의 하나님께는 누구도 대항할 수 없습니다. 욥은 자신의 계시 경험을 말합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이 '앞으로 지나가심'을 통해 계시를 경험하지만(4:15), 욥은 그분의 '지나가심'을 보지도 깨닫지도 못합니다(11절). 욥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합니다(12-13절). 욥은 자신이 의로울지라도 감히 하나님께 대답(대응)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분의 '힘' 때문입니다. 욥은 단지 심판하실 분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회개를 전제로 구하는 은혜가 아니라, 잘못한 것이 없어도 힘을 가진 재판장에게 구하는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욥은 하나님의 적대적 행동을 계속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행동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그때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간절히 간구할때가 있습니다. 당장에 필요한 재정적인 필요를 채워주시기를, 심각한 질병을 치유해 주시기를, 방황하고 있는 자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길잃어 버렸을때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시기를 간구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때때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간구했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으신 것처럼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관심도 없으시고 듣지도 않으시는 것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때로는 침묵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방법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대로 하나님이 반응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신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관심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으셔서 그분의 경륜과 섭리로 우리를 위한 하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고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욥이 자신의 온전함을 거듭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욥은 하나님의 적대적 행동을 직설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폭풍으로 치시고 '까닭 없이' 상처를 깊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는 사탄이 충동해 '까닭 없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는 숨 돌릴 틈도 없이 괴로움을 당했으며(18절), 하나님의 위력에 눌려 자신의 의로움을 제대로 입증할 길도 없습니다(19-20절). 그러나 자신의 '온전함'(순전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21절). 그는 심판에는 '온전한 자'와 '악한 자'의 구별이 없다고 하며(22절),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간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렇게 하는 이가 누구란 말이냐?"(24절). 이렇듯 계속되는 욥의 탄식과 질문은 끝까지 하나님을 향합니다.
나는 욥이 하나님 앞에서 당당했던 만큼 온전하고 정직한 삶을 사나요?
여기에서 말하는 욥의 온전하고 흠이 없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욥의 믿음을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욥이 완전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가 하나님이신 것과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신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다운 인간으로 사는 법은 바로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가지고 계시는 계획과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당황스럽고 답답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때 지금 당장은 어려움 가운데 처할 수도 있으나 그것을 견뎌내고 참아내며 앞날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거짓과 타협하지 않고 정직하게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가 바라는대로 우리가 원하는대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오히려 주님이 예비하신 더 좋은 길이 있음을 믿고 바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눈이 항상 주님을 바라보고 우리의 귀가 항상 주님의 말씀을 향해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님의 선하신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사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