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갈 2:11-21)
베드로의 위선을 책망함(갈 2:11-14)
11 그런데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에 잘못한 일이 있어서, 나는 얼굴을 마주 보고 그를 나무랐습니다.
12 그것은 게바가,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이 오기 전에는 이방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난 일입니다.
13 나머지 유대 사람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하였고, 마침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습니다.
14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이신칭의 은혜(갈 2:15-21)
15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이방인 출신의 죄인이 아닙니다.
16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하심을 받으려고 하다가,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18 내가 헐어 버린 것을 다시 세우면, 나는 나 스스로를 범법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19 나는 율법과의 관계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21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것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말씀묵상>
안디옥에 이른 베드로를 바울이 강하게 책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복음의 진리는 결코 타협하면 안 됩니다. 베드로는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이 오자 이방인과 식사하던 자리를 떠났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이들은 유대의 정결법을 지키기 위해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일을 금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는 과거 고넬료 사건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차별 없이 한 가족이 됨을 경험했습니다(행 10장). 그럼에도 그는 할례자들을 두려워해 위선을 행했고, 그 결과 바나바까지 위선에 빠지게 했습니다. 베드로와 바나바가 유대인들 앞에서 복음의 진리대로 행하지 않자, 바울은 베드로를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복음대로 살기 위해서는 복음이 아닌 것과 타협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성경 말씀대로 살기 위해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삶에서 무엇보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성경의 인물들의 공통점은 모두 당대의 사람들의 눈에는 미련하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조금만 타협하면 편하게 살 수 있는데도 그들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미련하게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전부로 여기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펼쳐 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눈에 주님을 위해 미련하게 되고 약하게 되어 사랑할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주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은 약해지더라도 우리안에 계신 주님이 강하게 드러나기 위해서는 미련하게 보이더라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신칭의는 구원론적으로, 교회론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나요?
모든 사람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겨집니다. 이 ‘이신칭의’ 진리가 베드로의 위선이 드러나는 문맥에서 선포됨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신칭의는 ‘구원론적’ 의미와 더불어,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 없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교회론적’ 의미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신칭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이루어집니다(20절). 베드로가 이방인들과의 식사 자리를 떠난 것은 다시 율법의 지배를 받는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요, 하나님 은혜를 헛되게 하는 일이며,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헛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21절).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성도는 차별하지 않고 하나 되는 삶을 추구합니다.
내가 버려야 하는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고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신 이후에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려주신 생활방식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을 완성하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버려야 하는 율법주의란 무엇입니까? 내가 나의 힘으로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로워지고 거룩하게 되려는 태도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흘리심으로 의로워지고 거룩해집니다. 이 진리를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는 율법주의적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예배당에 가서 기도하면 기도를 더 잘 들어 준다던가, 믿음이 좋으신 분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면 내 죄가 더 잘 용서 받는다던가 마치 유대인들이 거룩해지기 위해 지켰던 정결법과 같습니다.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온전히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사람의 시선과 세상의 비난이 두려워서 복음의 진리를 외면하거나 적당히 타협했던 제 모습을 회개합니다. 행위로는 조금도 의로워질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짐을 기억하며 위선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만 드러내는 인생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