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기꺼이 감내하는 아버지 같은 사역자(고전 4:9-21)
바울 일행이 복음을 전하면서 받은 고난은 어느 정도였나요?
고린도 성도들은 부유했지만 바울 일행은 비천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죽이기로 작정한 듯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로’(9절) 두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로마 군인들이 승리 생진을 할 때 패배한 장수들을 행렬의 맨 뒤에 질질 끌고 간 일을 연상하게 합니다. 바울은 사도들과 고린도 성도들의 삶을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약함과 강함, 비천함과 존귀함’으로 대조하면서 성도들의 각성을 촉구하비다. 그리고 사도들이 받은 고난을 구체적으로 진술합니다(11-13절). 사도들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이 스스로 돈을 벌어 사역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 만물의 찌꺼기’같이 될 정도로 조롱과 수치를 겪었습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복음 전파를 위해 기꺼이 감내할 고난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종종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가족들에게나 동료들 혹은 친구들에게 무안을 당하거나 수치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에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과 그 능력을 제대로 알게 되면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주님을 기뻐하며 자랑하며 사람들에게 그분에 관하여 증거하는 것이 복음 전파입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편안하고 걱정도 근심이 없는 안정적인 삶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고난 받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고린도 성도들을 낳았다’는 바울이 말은 복음 전도자에게 어떤 도전을 주나요?
바울은 복음 전파를 부모가 자녀를 낳는 일로 묘사합니다. 바울은 영적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고린도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의 ‘왕이나 된 듯이 행세’(8절)하는 것과 자신들의 ‘비천함’(4:9-13)을 대조한 이유는 성도들을 사랑으로 훈육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자녀가 아버지를 본받듯,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면합니다. 교만해져서 서로 파당을 만들어 대적하는 고린도 성도들 향해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르는 자신의 겸손과 비천함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대행자로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에 보냅니다. 그리고 자신도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계획이 있음을 알리면서 성도들로 하여금 미리 회개하도록 종용합니다. 그리스도의 겸손과 비천함을 본받을 때 교회는 회복됩니다.
내가 아버지 같은 사랑으로 양육할 지체는 누구인가요?
우리에게 복음을 전했던 이들이 바울과 같은 영적인 아버지의 마음으로 우리를 섬겨 주었습니다. 그들의 섬김과 헌신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이제 미숙한 어린 아이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자랐다면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돕고 양육하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양육한다는 것은 드러내놓고 “나는 당신의 영적인 아버지이고, 당신은 나의 영적인 자녀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배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듯이 우리의 말과 태도와 섬김을 통해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이 지시하신대로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가족일수도 있습니다. 직장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께서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섬겨주시고 구원하여 주신 것처럼 우리 또한 종이 되어 섬기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수치와 조롱과 고난가운데서도 우리를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주님 곁에서 주님과 함께 걷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