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당하는 이의 탄식을 무익하다 하지 마십시오(욥기 15:1-16)
엘리바스는 욥의 말과 행동을 어떻게 평가했나요?
고난당하는 이의 탄식과 거친 말을 무익한 말로만 생각해선 안 됩니다. 엘리바스는 '아니다'를 유도하는 수사의문문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합니다. 지혜자라면 열을 올리며 궤변을 말하지 않는데, 욥의 말은 이같이 쓸모없고 무익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탄식하며 하나님께 질문하는 욥의 모습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과 기도, 즉 신앙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봅니다. 더 나아가 욥의 행동과 말이 욥 자신이 죄인임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이러한 엘리바스의 지적은 어떤 면에서는 타당합니다. 그러나 아픈 현실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맹목적 신앙인보다, 탄식하며 질문함으로써 하나님 뜻과 의를 구하는 신앙인이 더 깊고 맑은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올바른 논쟁을 위해 내가 앞뒤 맥락을 더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내가 모든 질문의 답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함부로 나의 생각만이 옳다고 단정짓지 않는 것입니다. 여유를 가지고 상대방의 말을 듣고 받아들이며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답도 단정지어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논쟁하는 주제에 대해서 내 생각을 관철시키는 것보다 나와 논쟁하는 그 사람 자체가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얻고 사람과의 관계를 잇고 연결하기 위해서 대화를 하는 것이지 관계를 끊고 사람을 잃기 위해서 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논쟁하는 주제보다 나와 논쟁하는 사람에게 더 집중하고 이 세상의 모든 논쟁이 지향해야할 최고의 방향성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엘리바스가 인간의 부정함과 죄악성을 다시금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엘리바스는 욥이 '최초의 인간'과 같이 오래되고 뛰어난 사람인지 묻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했을 것이고, 누구도 없는 지혜를 가졌을 것이며, 친구들보다 아는 것도 많고 깨달음도 클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위로와 부드럽게 하시는 말씀'(11절)을 욥이 거부할 뿐 아니라 도리어 눈을 부라리고 대든다고 합니다. 그는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본질적으로 의로울 수 없다며 다시금 인간의 부정함을 강조합니다. 이렇든 엘리바스의 말은 경험과 지혜에 기초해 권위있게 들립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듣는 이에게 감화를 주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고난당하는 친구의 허물을 둘춰내거나 질책하지는 않나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악하고 허물이 많은 인간인지 알면서도 우리를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친히 우리 곁으로 보내셔서 우리의 악과 허물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대속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고난당하는 이들을 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만달란트 빚진자의 비유처럼 우리가 받은 값을 수 없는 그 사랑안에서 친구나 가족이나 이웃이나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혹시나 이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허물을 들춰내고 질책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바라보고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허물을 들춰내지 않으시고 질책하지도 않으시고 나를 품어주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넘어 우리의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기셔서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법이 우리의 기준이 되게 하소서. 재판관의 자리에서 내려와 형제자매를 돌아보며 품고 세우는 자리에 서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