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자의 두려운 위엄만 부각하는 반쪽 신앙(욥기 37:14-24)
하나님의 '엄위하심'만을 강조하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인간은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극히 일부만 알 뿐입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욥에게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고 요청합니다(14절). 그는 '아십니까?'와 '할 수 있습니까?'라는 수사적인 질문을 던집니다(15-18절). 이는 욥이 답변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엘리후의 진술은 하나님의 발언(38-41장), 곧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무능을 극명하게 강조하는 내용과 유사하기에 이를 예비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엘리후는 무능하고 무지한 인간은 창조 하나님께 어떤 말라도 대항할 수 없으며, 섣불리 말하다가 삼킴을 당한다고 경고합니다. 엘리후는 사람이 쉽게 가까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속성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긍휼의 하나님은 무지하고 무능한 인간을 찾아오시고, 만나 주십니다.
내게 하나님은 언제든 가까이할 수 있는 분인가요, 섣불리 가까이하기 어려운 분인가요?
내가 하나님을 언제든지 가까이할 수 있는지 아니면 섣불리 가까이 하기 어려운지는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분 곁을 내어 주시려는 마음이 있다면 나는 그분 곁에 언제든지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나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가 하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나를 위해 이 땅에 보내어주시고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변함없으신 사랑이라면 이제 언제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나의 몫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향해 보여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반응하여 나의 사랑과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은 이제 내가 할 일이 되었습니다.
발언을 마무리하면서 엘리후가 '하나님 경외'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 앞에 인간은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밝은 빛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21절), 북쪽의 빛과 두려운 위엄은 빛의 현현과 함께 드러나는 하나님의 위엄을(22절) 말해줍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위엄 앞에서 사람이 취할 태도는 '하나님 경외'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람이 하나님께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경외'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욥에게 말씀해 주십니다(38:1). 엘리후의 발언은 "하나님의 권능이 크고 정의로우신데,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 못합니다. 욥과 같이 고난당하는 이에게 진정한 답변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랑으로 경외하는 것과 두려움으로 경외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두려움으로 경외하는 것은 경외라기 보다는 '공포'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공포에 눌려 공포의 대상에 굴복하는 것과 사랑으로 경외하는 대상에 순종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분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에 대한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 앞서서 그렇게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사랑에 대한 경외함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향해 무한히 헌신하는 어머니의 사랑을 보며 감동을 넘어 경외함을 갖게 됩니다. 그러한 어머니의 사랑의 근원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창조주, 주권자,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변함없고 신실하신 사랑이 우리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며 감탄하게 하며 기뻐하게 하며 그분께 순종하게 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변함없이 풍성하신 사랑에 감사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랑보다 크신 아버지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위대하시고 전능하시고 거룩하시며 높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각별한 관심과 돌보심으로 우리를 가까이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사시는 아버지!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