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이 평안히 사는 세상, 신앙적 기대와 다른 현실(욥기 21:17-34)
죽을 때까지 평안을 누리는 사람과 고통 가운데 죽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 어떤 차이가 있나요?
성도는 불의하게 고통당하는 이의 탄식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욥은 얼마나 자주 악인의 불빛이 꺼지며, 그가 바람에 날려가는 검불이나 겨와 같았는지 질문합니다. 검불이나 겨는 심판과 관련됩니다. 욥은 악인이 당대에 전능자의 진노의 잔을 받아 마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어서 욥은 선악의 기준으로 분류되지 않은 다양한 삶을 열거합니다. 어떤 사람은 왕성하고 안락한 가운데 죽지만, 어떤 사람은 고통 가운데 죽습니다(23-25). 두 부류의 사람 모두 죽음 앞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이러한 욥의 진술은 성도가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 대응하게 합니다.
고통스러운 죽음을 허락하신 주님 뜻은 무엇일까요?
고통가운데서 하나님을 믿기가 어려워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을 외면한다고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열두 제자에게 예수님을 외면하고 떠난 다른 제자들처럼 자신을 버릴 것이냐고 물으셨을때 베드로는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요 6:68)라고 말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답을 찾으러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오늘 보여지는 각 사람들의 인생의 모습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편안하게 행복하게 주고, 또 어떤 사람은 고통스럽게 죽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묻고 답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주권자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아는 분명한 진리는 하나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자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전한 위로의 말이 욥에게 '헛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잘못된 판단의 말은 상대방에게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욥은 친구들이 자신을 해하려하는 속셈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세상일을 사람에게 질문해 누구의 말이 옳은지를 밝히고자 합니다. 그는 '악인이 재앙의 날을 위해 보존되며, 그들이 진노의 날을 향해 끌려가고 있는가?'를 묻습니다(30절). 욥의 답변은 "아니다."입니다. 욥은 다시 '누가 악한 며자를 꾸짖으며, 그가 저지른 대로 징벌하는가?"를 질문합니다(31절). 욥은 악인의 삶에 보응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악인의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은 교리적 차원에서 악인의 운명을 말했지만, 욥이 경험한 현실을 정반대입니다. 그러니 친구들의 위로는 욥에게 '헛된 것'이고, 그들의 대답은 '거짓'입니다.
내가 하는 말이 '헛된 위로'나 '거짓'이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앞에 늘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가 깨닫게 된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며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방법을 뛰어넘으십니다. 그래서 고통가운데 있는 누군가에게 말을 할때 우리는 먼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겸손히 구해야 합니다. 누가 옳으냐에 대한 논쟁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시다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의 생각과 말이 항상 옳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행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부족한 우리의 말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에게 베풀어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께만 우리의 인생의 정답이 있음을 믿습니다. 현실의 어려움을 핑계로 주님께 등을 돌리지 않게 하소서. 주님을 떠나 그 어디에서도 영생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없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지 먼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말을 사용하셔서 주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