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과 슬픔중에 꿈꾸는 불가능의 가능성(욥기 14:13-22)
'스올에 감추어 달라'는 요청에서 욥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는 무엇인가요?
절망적 상황에서도 회복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욥은 자신을 '스올'에 숨겨 달라고 요청합니다. 구약성경 다른 곳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곳이 없다고 합니다(시 139:8; 암 9:2 등). 또한 스올은 되돌아올 수 없는 곳입니다(7:9-10; 10:21 등). 그럼에도 욥은 스올을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은신처'로 묘사합니다. 이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욥은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동시에 인식합니다. 이처럼 고난은 인간에게 현실을 능가하는 소망을 품게 하고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욥은 진노가 그치면 하나님이 자신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부름'과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횔 것입니다(15절).
나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곧 나를 '구원하실' 분임 확신하나요?
우리의 존재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는지 다양한 추측을 하고 가설을 세워보지만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께로 부터 나왔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살도록 지음받은 인간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하나님을 떠나게 된 상태가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이 바로 이 인간이 죄 가운데 있는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죄가운데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감히 생각지도 못할 방법으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인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살이 아프고 영혼이 애곡한다'는 표현(개역개정, 22절)에서 육체와 영혼의 관계는 어떠한가요?
하나님의 권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산과 바위는 탁월함과 견고함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능력 앞에는 무력합니다. 물이 돌을 닳게 하고 땅의 티끌을 쓸어 가듯 하나님은 사람의 희망을 끊으십니다. 희망을 끊는다는 것은 절망적 상태로 만들거나 생명을 끊어 버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 인간이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시며, 얼굴빛을 변하게 해 죽음의 세계로 떠나게 하십니다. '살'(육체)과 '영혼'을 가진 인간은 현실 세계에서 고난이 가득한 삶을 살아갑니다. 욥은 고난과 실존과 죽음 사이에서 하나님 앞에 탄식합니다.
육체의 고통은 나의 내면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나요?
인간은 천성적으로 육체적 본성과 영적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정신과 영혼을 포함합니다. 정신 또는 영혼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독특성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서로 분리되는 존재가 아니라 육체와 영혼이 서로 통합된 전인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고통은 나의 내면세게에 영향을 끼칩니다. 몸이 지치고 힘들면 마음까지도 지치고 힘들게 됩니다. 반대로 마음이 즐겁고 기쁘면 몸에 힘이나고 생기가 돌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창조하신 우리의 몸과 마음이 주님께서 주신 사용설명서인 성경말씀을 따라 올바르게 살아갈때 우리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께로 부터 시작되었음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최고의 고통은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인 것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생명과 풍성한 삶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믿습니다. 그 어떤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라도 살아계신 우리 구주 하나님께서 계시는 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음을 늘 기억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