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속 믿음의 행동, 절망 속 믿음의 선택(눅 8:40-56)
12년간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께 한 믿음의 행동은 무엇인가요?
주님은 수치당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죽어 가는 외동딸을 살려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예수님이 그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당하던 한 여인이 그분 옷자락에 손을 대자 ‘즉시’ 치유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옷자락만 만져도 치유되리라는 믿음을 한 행동입니다(마 9:21). 율법에 따르면, 혈루증 걸린 사람과 접촉하는 사람은 부정해집니다(레 15:25-27). 하지만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라고 하시며 그의 ‘믿음’을 인정해 주십니다. 수치심과 열등감으로 위축될수록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주님은 육적 치유와 영적 회복, 곧 전인적 구원을 베푸십니다.
전인적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 앞에 나는 어떤 믿음의 행동을 할 수 있나요?
성령께서는 우리를 전인적으로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실 때 전체(wholeness)로서의 인간으로 보십니다. 전인적인 구원의 역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듭나는 순간부터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우리의 영혼과 육체에 전체적으로 확산됩니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성령께서 베푸시는 인간 구원과 치유의 과정은 우리의 영혼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먼저 해방되어야 마음도 치유되고 그리고 몸도 구속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전체적 영역이 구원의 은혜로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감화시키고 훈련시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전인적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과 육체의 부활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는 말씀에서 성도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절망스러운 상황일수록 말씀을 따르는 믿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회당장 야이로 집으로 향하시던 예수님 행보가 지체되는 사이에 그의 외동딸이 죽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난 것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은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딸이 나을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믿음’의 도전을 주십니다.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울지 말아라.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고 하십니다. 아이의 죽음을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지만, 예수님은 그에 반응하지 않으시고 “아이야,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생명을 회복시키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권자십니다. 생명이요 능력인 그분 말씀 앞에서 죽음의 권세는 힘을 잃습니다.
절망 속에서 내가 믿음으로 붙잡을 소망의 말씀은 무엇인가요?
인간은 소망으로 사는 존재이기에,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절망입니다. 소망이 사라지고 절망이 찾아올 때, 그 고통은 정말 크게 느껴집니다. 절망을 이기고 소망을 회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절망을 이기고 소망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오페라에서 막이 오르기 전에 연주하는 곡을 ‘전주곡’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절망은 소망의 전주곡인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절망을 이기고 소망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슬픔과 절망은 결코 끝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과 소망이 오기 전에 울리는 전주곡입니다. 이 세상에서 믿던 사람들과 믿던 것들이 하나씩 끊어져 나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기력함과 무능력함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는 절망 속에서도 붙들 수 있는 주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아픔과 고통에서 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갇힘과 억눌림에서 해방시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만 믿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