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함을 깨우치실 때 곧바로 항복하십시오(욥 40:1-5)
하나님이 욥을 다투는 자, 꾸짖는자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발언은 욥의 탄식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욥을 지칭하시는 두 가지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먼저 '다투는 욥아'(2절)라고 하십니다. 이는 욥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 탄식하고 줄기차게 질문한 모습을 평가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욥에게 '네가 나를 꾸짖을 셈이냐?'(2절 히, 모카아흐)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의미는 옳고 그름을 정해 주는 '심판자'입니다. 하나님과의 소송을 원하던 욥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판결자'가 없다고 탄식한 바 있습니다(9:33). 하나님은 이러한 호칭으로써 욥의 행동을 풍자하시며 그의 부족함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욥의 탄식에 응답하시면서도 그의 잘못된 세계관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말씀으로 깨달은 나의 잘못된 생각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래서 욥기 38-41장의 말씀을 읽으면서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함부로 할 수 없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들이 뛰놀 수 있는 마당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세계안에서 조심스럽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전에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식물과 동물을 취하여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산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생명을 취하여 우리의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생명에 “빚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대답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욥은 어떻게 반응했나요?
하나님의 발언에 비해 욥의 답변은 짧습니다. 욥은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비천합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가볍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거나 놀라움을 표현하지도, 하나님을 찬양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이제 허리를 동이고...대답해 보아라"(38:3)라는 요구에 맞서 자신이 하나님과 다툼을 벌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뿐입니다. 손으로 입을 가리는 행동은 '신중함, 거부, 잠시 멈춤'등 다양한 의미로 해석됩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라는 다짐도 그의 주장 철회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욥의 답변에 하나님은 두 번째 발언을 준비하십니다.
내 주장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을 때 내가 하나님께 취하는 태도는 어떠한가요?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만약 나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나는 하나님처럼 악한 자들을 저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악을 척결하여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텐데. 하나님은 왜 힘이 있으면서도 악인들을 저렇게 내버려두실까?'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이 참으로 복잡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 세상을 아름답고 평화롭게 만들수 있다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 13장에 나오는 비유에서 이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밀밭에 밀을 뿌렸는데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밀이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쯤 보니까 가라지도 보였습니다. 그래서 종들이 주인에게 “우리가 가서, 가라지를 뽑아 버릴까요?”하고 묻자 주인은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는냐? 추수할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하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옳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때가 정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 순간에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를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지으신 것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가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선하신 뜻을 우리의 양식으로 삼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