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룩 같은 거짓 교훈을 주의하라(마 16:1-1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시험해 구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물과 기름 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사두개인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율법을 부정하고 모세오경만 인정했습니다. 또한 천사의 존재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반면 바리새인은 모세오경과 구전을 모두 중시하고 천사의 존재와 부활을 믿었습니다. 이처럼 큰 차이가 있음에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일에는 한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행하시는 일이 종말의 구원 사역임을 가르치시며, 그들에게 보여 줄 것은 요나의 표징뿐이라고 하십니다. 사람 눈에는 약해 보이는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성도는 약함의 베일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 능력을 십자가에서 발견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할 때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되나요?
부모가 자녀를 믿지 못하고 자녀가 부모를 믿지 못한다면 슬픈 일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믿지 못하고 아내가 남편을 믿지 못한다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사람이 창조주를 믿지 못하고 구원자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이것보다 비극은 없습니다. 믿지 못하는 대상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넘치게 주시려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요 10:10). 그런데 우리는 그런 주님을 의심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며 "당신이 나이 구원자가 맞습니까? 나를 구원한 것이 맞습니까? 내가 지금 구원받은 것이 맞습니까? 나에게 지금 좋은 것으로 주시는 것이 맞습니까? 증거를 보여주세요."라고 끊임없이 묻는 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 증거를 믿지 못한다면 다른 어떤 증거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먹는 떡에 대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현세적인 영광과 번영만을 바라다가 메시아를 직접 보고도 깨닫지 못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영적 무지와 어리석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어둠은 떡의 문제에 집착할 때 생깁니다. 예수님을 통한 물질적 풍요와 안정된 삶을 추구하면서 그분의 십자가를 사소하게 여김은 어리석습니다. 성도는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하는데 열심을 내야 합니다.
내가 경계할 삶의 방식은 무엇이며, 예수님안에서 추구할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요?
예수님 당시 로마의 식민지배 아래 있던 유대인들은 당시의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는 방식으로 여러가지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타락한 지도자들이 있었고, 거짓 스승들이 있었고,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 해 보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들은 결국 이스라엘을 파멸로 이끌고 말 것입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이런 삶의 방식을 두고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파멸의 길, 죽음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오직 회개하고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고 사모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너비와 크기를 보게 하소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날마다 더 알게 하소서. 우리안이 얕은 의심과 흔들리는 눈동자를 붙들어 주소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새창조의 능력으로 날마다 새로워지게 하소서. 눈이 멀어 보지 못한채 거짓을 붙들고 속아 흘러가는 이들의 말을 분별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