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강건하고 충만한 삶(엡 3:14-21)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엡 3:14-15)
14 그러므로 나는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빕니다.
15 아버지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붙여 주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엡 3:16-21)
16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18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19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20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말씀묵상>
바울은 하나님을 어떻게 불렀으며, 그 호칭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요?
바울은 십자가로 하나 된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서서 기도했는데(눅 18:11), 바울이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은 전능자 앞에 항복하는 태도요 겸손함과 간절함의 표현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붙여 주신 분'이라고 부릅니다(15절). 이는 아담이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 준 것을 연상시킵니다(창 2:19). 고대에는 국왕이 공을 세운 신하에게, 혹은 귀족이 노예를 입양할 때 이름을 주고 그를 소유로 삼아 권한을 행사하며 보호 책임을 다했습니다.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전능자입니다.
기도할 때 내가 하나님 앞에 수식어를 자주 사용하는 표현은 무엇인가요?
누군가에게 무언가 부탁을 할 때는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하나는 그 사람이 그 일을 할 수 있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이 그 일을 하려고 하는가입니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부탁할 수 없고, 반대로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부탁할 이유가 없습니다. 능력과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무엇보다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원래부터 하나님과 이런 관계였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본래 불순종의 아들이었고, 진노의 자녀였습니다(엡 2:2-3).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셔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들이기에 두려움과 떨림없이 담대함과 확신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도는 교회 연합의 힘입니다. 바울의 기도 내용은 첫째,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입니다(16절).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적 인격이 강건해지면 박해와 유혹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둘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는 것입니다(17절). 말씀과 기도로 믿음이 자라 가면,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고, 하나님 뜻에 민감한 영성을 갖추게 됩니다. 셋째, 사랑 가운데서 뿌리와 터가 견고해지는 것입니다(17절). 사랑은 서로의 차이점을 극복하고 하나로 결속하게 합니다. 넷째,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18-19절). 바울은 그 사랑의 너비(만민을 품는 사랑)와 길이(영원한 사랑)와 높이(하늘의 유업)과 깊이(용납과 용서)를 깨달아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지길 간구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대할 때 교회는 하나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내가 마음을 더 넓히고 용납할 지체는 누구인가요?
교회된 우리들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써서 알아가야 합니다. 즉, 우리들 각자가 그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닮아서 사랑 안에 견고해 질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서로를 통해 경험할 수 있고, 그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선순환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교회의 형제자매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서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럽습니까?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상처를 덜 받는 그런 관계입니까? 서로 덜 보고 교제도 덜 해야 다툼이 없고 갈등이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자들입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세상이 경험하지 못한 사랑을 우리가 알고 경험한 자들입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제 일상에 베푸시는 충만한 사랑을 기억하며 오늘도 기쁘게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성령으로 제 속사람을 강건히 붙드셔서 세상을 이기게 하시며,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시고 믿음 위에 든든히 서게 하소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아버지께 무릎으로 나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