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중에 시인하는 복과 화의 주권자(욥기 2:1-13)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9절)라는 아내의 말에 욥은 어떻게 대답했나요?
사탄은 하나님의 사람을 넘어뜨리려는 계략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탄 시험에도 신앙을 굳건히 지킨 욥을 칭찬하십니다. 그러자 사탄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새로운 제안으로 맞섭니다. 만약 욥의 '뼈와 살'(몸)을 치신다면, 욥은 분명히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생명은 해하지 말라고 하시며 욥을 사탄의 손에 다시 맡기십니다. 사탄은 욥의 몸을 공격해 '악성 종기'가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온몸을 뒤덮게 합니다. 욥의 아내는 어리석게도 현실에 굴복해 욥의 온전한 믿음을 흔듭니다. 하지만 욥은 복과 재앙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킵니다.
욥과 같은 고백을 하며 내가 겸손히 받아들일 일은 무엇인가요?
많은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이 선한 것이고 내가 보기에 나쁜 것이 악한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한 마디로 자기 스스로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을때 의도하신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원수 사탄의 말을 듣고 그와 함께 하나님께 반역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자신의 생각에 두지 않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눈에 보기에는 좋은 일처럼 보이는 것이나 혹은 나쁜 일처럼 보이는 것이나 그 일의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롬 8:28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 선하심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욥을 방문한 친구들이 욥을 보고 취한 행동은 어떠했나요?
욥의 소식을 듣고 세 친구가 방문합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입니다. 욥과 나눈 대화로 미루어 볼때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 지혜와 영향력 면에서 이스라엘 주변 세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칠십인역 성경은 그들을 '왕들'이라고 지칭합니다. 그들이 욥을 찾아온 목적은 욥에게 애도를 표하고 그를 위로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병들고 초췌해진 욥의 모습에 그들은 울면서 옷을 찢고 티끌을 머리에 뿌리며 비통함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할 말을 잃은 채 7일 밤낮을 침묵하며 욥과 함께합니다. 친구들의 이러한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탄식하는 이에게 진정한 '이웃'의 모습이 무엇인지 일깨워줍니다.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과 함께 우십시오."(롬 12:15)라고 말씀합니다.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먼저 공감해 주라는 말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웃이 겪는 어려움의 상황을 깊이 이해하기도 전에 나의 관점과 판단으로 이웃의 어려움에 대한 의견을 내놓기에 바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한 그 이웃에게 더 필요한 것은 본인이 지금 아파하고 있는 있음을 알아주는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어려움을 당한 이웃은 자신을 찾아온 형제자매의 진심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어려움을 당한 이웃에게 하는 말 한마디가 힘을 얻게 됩니다. 누가 어려움을 당한 이웃의 옆에서 그의 고통을 진심으로 공감하며 위로해 줄 수 있습니까? 자기 자신도 비슷한 고난을 경험해 본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겪을 당시에도 유익하지만 그 경험을 통하여 다른 이들을 도울 때에도 유익한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판단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위에 두지 않겠습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우리 스스로 판단해 왔던 교만과 어리석음을 내려놓고 주님의 주권앞에 겸손히 무릎꿇습니다. 우리의 판단으로 형제자매를 판단하기에 앞서 그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용납해주며 함께 하겠습니다. 오직 우리의 위로가 되시며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함께 바라보겠습니다.